Promise
로켓퀼
원래 지구에 사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것이었다가, 이 광활한 우주를 떠돌아 용케 노웨어까지 흘러든 손바닥만 한 기계에는 정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담겨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모르는 준ZUNE의 예전 주인이 꽤나 폭넓은 음악 취향을 가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월동 준비를 하는 다람쥐처럼 여러 상황과 이벤트에 대비한 노래들을 준 안에다 차곡차곡 저장해 둔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히 크리스마스 캐롤이었다.
준의 소유권이 아직 피터 제이슨 퀼에게 있던 시절, 퀼은 자기 기분이 내킬 때면 종종 준의 음악을 주변 이들도 함께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로 크게 틀어놓곤 했는데, 그것은 가지각색의 개성과 취향을 가진 노웨어의 주민들이 아무 이견 없이 다 함께 좋아하는 얼마 안 되는 이벤트 중 하나였다. 애초에 시끌벅적한 소음이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노웨어는 잠깐 머물다 가기도 벅찬 장소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틀어둔 노래의 제목이나 가사에 스쳐 지나가듯 ‘산타’라던지 ‘크리스마스’ 같은 단어가 나오기라도 하면, 퀼은 마치 ‘어이쿠, 실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가장 가까운 주변인에게 조심스럽게 지어 보이면서 바로 다른 노래를 재생하는 버튼을 눌러 미련 없이 그 노래를 뒤로 넘겨 버리고는 했다. 피터 퀼이 더 자주 듣거나 먼저 찾아 듣는 노래는 있을지언정 막 재생을 시작한 노래를 그렇게 가차 없이 넘겨 버리는 경우는 잘 없었기에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꽤나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을 맞닥뜨릴 때마다 피터 퀼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태연하게
“캐롤은 크리스마스에 들어야지.”
라는 한마디의 대답으로 일축하곤 했다. 마치 이것만으로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설명된다는 듯이.
물론 그 당시 퀼의 그 대답을 바로 알아듣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크리스마스가 뭔데?’라고 되묻는 이들이 절반 정도였으며, 그것이 지구라는 행성의 꽤 크고 유명한 명절이란 걸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이들조차 막연히 ‘특정 시기에만 감상을 허락받을 수 있는 음악이라니 어떠한 마법적인 법칙이나 저주 같은 게 있나 보지?’라고 생각했으므로. 그 무수한 무지와 오해 앞에서 퀼은 “생일 축하 노래 같은 거야! 그런 건 생일에만 듣잖아!”라고 다시 한번 열변을 토했지만, 불행히도 그의 주변에는 생일에 왜 축하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조차 이해를 못 하는 이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썩 좋은 추가 설명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준의 주인이 ‘아무튼 그렇다’고 하니 대부분은 그 이상 깊게 캐물으려 들지 않는 편이었다. 물론 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거나 리듬에 맞춰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몇몇은 캐롤 특유의 밝고 흥겨운 음을 들을 때마다 ‘이걸 꼭 그 시기에만 들어야 하는 거냐’며 때때로 아쉬워하는 티를 내긴 했지만, 결국엔 모두 “그래, 피터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라는 태도로 수긍하며 퀼의 선곡에 순순히 따르곤 했다. 애초에 그들의 삶에 음악이란 것을 가져다준 것이 바로 스타로드였고, 테라에서 나고 자랐던 그가 그렇다면야 당연히 그게 옳은 것일 테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멤버들과 노웨어의 주민들이 크리스마스 캐롤이란 음악의 특수성과 특별함을 어렴풋하게나마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스타로드가 어린 시절부터 흠모해 온 테라의 영웅’ 케빈 베이컨이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를 정말 제대로 알려 주고 난 뒤였다. 그 화려한 빨강과 초록, 그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것들, 그 끝내주는 음악들이라니! 그렇게 크리스마스는 자연스럽게 노웨어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정당하게 준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로켓 또한 이전 주인과 똑같이 준에서 때아닌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올 때마다 능숙하게 다음 노래로 넘겨 버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노웨어의 삶에 한창 적응하는 중인 아담 워록과, 노웨어에 오기 전에 들어 본 음악이라고는 하이 에볼루셔너리의 취향에 맞춰진 (드랙스의 비유에 따르면)‘귀신이 문고리가 고장 난 화장실 안에서 구슬피 우는 듯한 소리’ 정도밖에 없는 어린 실험체 출신들이 로켓의 그런 반응에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마다, 로켓은
“캐롤은 크리스마스에 들어야지.”
라고 과거의 피터 퀼과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덧붙여 네뷸라는 로켓의 그 말을 우연히 근처에서 들을 때마다 엄청나게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리를 뜨곤 했는데, 크래글린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옆집에 사는 점잖은 중년 부부의 키스 장면을 맞닥뜨린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물론 로켓은 그 반응을 뻔뻔스러운 무시로 일관했다.)
하여튼, 이 모든 이유 때문에 퀼이 로켓과 가장 마지막으로 영상 통화를 하다가 어렴풋이 노웨어 광장에 틀어둔 캐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꽤 흐뭇한 웃음을 보였던 것인지도 몰랐다. 시간은 크리스마스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전이었고, 로켓이 막 자신이 미국 중부 시간대로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부터 휴가를 내 지구에 있는 퀼의 집에 방문하겠노라 통보 아닌 통보를 마친 참이었다. 로켓의 작업대 위에 띄워진 선명한 화면 속 피터 퀼은 한 손으로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로켓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거기도 한창 이벤트 준비 중인가 봐?」
퀼과의 통화 시간이 길어지는 사이 최근 새로 구상 중인 소형 탐색 장치의 설계도에 잠시 한눈을 팔았던 로켓은 그제야 광장에 작은 볼륨으로 틀어진 잔잔한 캐롤의 존재를 알아차리곤 귀를 움찔거리면서 코끝을 몇 차례 문질렀다.
“뭐…… 그렇지. 저번에 한번 해 봤으니까, 이번에는 더 크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
「아, 제발. 또 여기서 누굴 납치해 가는 짓은 하지 마.」
“걱정 마, 올해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만 오붓하게 보낼 예정인 것 같으니까.”
로켓은 그렇게 말하곤 잠깐 낄낄거렸다가, 아까보다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솔직히, 아직 어린애들이 많아서 당분간 외부인을 들이기 좀 그렇기도 하거든.”
「흠…… 그러고 보니, 내가 걔네들한테 보낸 선물들 전부 잘 도착했지?」
“아, 그거… 젠장, 안 그래도 크리스마스 아침까지는 선물 뜯어 보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대체 누굴 닮았는지 죄다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서는―”
이후 둘은 몇 가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퀼이 양 눈꼬리에 투명하고 묵직한 추가 달린 사람처럼 느릿느릿 두 눈을 깜빡거리고 하품을 할 즈음이 되어서야 로켓이 먼저 아쉬운 마음을 감추면서 통화 종료를 선언했다. 그때, 퀼이 창가를 바라보며 무심코 중얼거린 한마디를 로켓의 예민한 청력이 놓치지 않고 꽤 온전한 형태로 잡아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로켓 네가 여기 왔을 때 눈이 오면 좋을 텐데. 물론, 너무 많이는 말고……」
목소리의 크기나 내용상 그것은 로켓에게 대답을 원한다기보단 단순한 혼잣말에 더 가까워 보였기에 당시 로켓은 퀼에게 얼른 자러 가라는 말을 한 번 더 남긴 것 말고는(‘이 닦는 걸 잊지 말라’는 놀림으로 퀼을 한번 발끈하게 만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 중얼거림에 굳이 반응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 통화가 끊긴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면서 로켓은 이번에도 피터 퀼이 자신에게 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눈’이라는 기상 현상을 기다려 본 적이 없었으므로.
*
미주리에 거주하는 제이슨 퀼 씨와 그의 하나뿐인 외손자가 삼십여 년 만에 다시 함께 보내는 올해의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먼 은하의 노웨어에서 준비하는 것에 비하면 무척 아담하고 소박했다. 그야 크리스마스를 온 힘을 다해 즐기려는 힘 좋고 실행력 있는 괴상한 외계인들이 상주하지 않는 일반적인 단층 가정집 규모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로켓은 이러한 크리스마스 분위기 또한 몹시 만족스럽다고 느꼈다. 세 사람은 은은한 조명이 내리쬐는 부엌 식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꽤 공들인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각자의 근황을 공유했고(물론 그와 피터 퀼은 이미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평균 삼십 분 정도의 영상 통화를 나누는 사이였으나, 원래 이야깃거리란 마음만 먹으면 정말 화수분처럼 넘쳐흐르는 법이다), 조금 일찍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였으며(로켓은 제이슨이 연극 소품을 파는 곳에서 사 왔다며 리본을 묶어 건네준 ‘후크 선장’이란 작자의 갈고리 의수를 보고 정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함께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크리스마스 특선 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했다. 사실 로켓은 그게 대체 뭐가 재밌는지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으나, 퀼이 재밌어하며 보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겼을 뿐이지만.
그러다 밤이 깊어질 무렵, 퀼의 외할아버지는 못 만난 사이 지나치게 장성해 버린 외손자가 자신의 ‘남자 친구’와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은근슬쩍 자리를 비켜 주었으며― 덕분에 둘은 퀼의 침실에서 넷플릭스란 것을 함께 보다가 꽤나 어른스러운(달리 말하자면 미성년자는 자세히 알면 굉장히 곤란한) 방식으로 회포를 풀기까지 했다. 로켓은 지구의 일반적인 크리스마스가 다 이런 느낌인지는 결코 알지 못했지만 100점을 만점이라고 쳤을 때 이미 최소 95점짜리 크리스마스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대로 숙면하다가 다음 날 아침 퀼과 함께 일어나 아침 식사를 했다면 남은 5점도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몰랐으나…
“로켓, 로켓!”
정말 오랜만에 푹 단잠을 자고 있던 로켓은, 제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면서 다급하게 이름을 속삭이는 퀼의 목소리에 꼬리털 끝까지 모조리 바짝 세워가면서 두 눈을 번쩍 떠야만 했다. 뭐야? 설마 습격이라도 받았나? 그러나 언제 침대를 빠져나온 것인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퀼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긴 해도 겁에 질려 있거나 긴장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나서 로켓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에서 곧바로 힘을 뺐다. 그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면서 대답하기 위해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뭐야… 왜 그래?”
“지금 눈 오고 있어!”
“눈?”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로켓이 아까보다 더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눈이 와서, 그래서 뭐?”
“뭐긴,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뜻이잖아!”
그러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뭐 어쨌다고? 하지만 로켓이 또다시 멍청하게 되묻기 전에 이미 가장 위에 걸칠 외투 빼고는 거의 다 차려입은 상태인 퀼이 아직 침대 이불에 파묻혀 있던 로켓의 한쪽 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퀼을 물고 빠느라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상태였던 로켓은 당황하면서도 얼떨결에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우리 잠깐만 나가 보자, 로켓. 응? 딱 십 분만!”
“잠깐, 피트, 나 지금 너무 추운데―”
“따뜻하게 껴입고 나가면 되잖아, 내가 너 여기서 입을 옷도 많이 주지 않았어?” 퀼은 로켓의 그 드물디 드문 엄살을 매정하리만치 단호하게 끊어내더니 연달아 줄줄이 잔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너 애초에 이 한겨울에 그렇게 웃통 벗고 자는 게 말이 되냐? 우리 할아버지가 지금 네 꼴을 보면 기절하실걸. 너 여기서 지내는 동안에는 잘 때도 티셔츠 정도는 좀 주워 입어.”
좀 전까지만 해도 제이슨 퀼이 봤으면 바로 심장마비로 쓰러질 만한 짓을 로켓과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던 주제에, 이제 와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은 퀼은 로켓이 다시 싫다고 하기 전에 얼른 그를 침대 밖으로 끄집어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는지 기어코 로켓의 허리즈음에 간신히 둘러져 있던 이불을 쑥 잡아뺐다. “야, 야! 이런 미친…!” 갑작스레 완벽한 팬티 바람이 된 로켓이 버럭 짜증을 내기 시작하자마자 네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로켓이 입을 만한 옷가지들을 머리 위에다 와르르 쏟아낸 것은 덤이었다.
결국 로켓은 기습 공격으로 인한 이 치욕스러운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여기서 순순히 굴지 않았다간 이대로 담요 한 장만 겨우 두른 채 그 망할 눈을 보러 피터 퀼에게 끌려 나갈 것이 너무나 명백했던 탓이었다.
*
아니, 눈 따위가 대체 뭐가 좋다고… 겨우 외출용 복장을 껴입고 현관에서 퀼에게 빌린 부츠에 발을 욱여넣어 신을 때까지도 로켓은 속으로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그는 굳이 따지자면 더운 환경보다는 추운 환경 쪽이 더 견딜 만하다 생각하는 쪽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에 일부러 따뜻한 침대를 뿌리치면서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종류의 머저리는 아니었다.
왜 눈 오는 걸 직접 나가서 봐야만 하는 거지? 눈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실컷 볼 수 있는데. 로켓은 잠이 달아나 점점 명료해지는 정신 속에서 매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캡틴다운 불만을 생각했다. 실제로 우주에는 수많은 행성의 숫자만큼 다양한 기후가 존재했고, 눈과 얼음이 층층이 쌓인 환경은 그 중에선 제법 흔한 편에 속했다.
심지어 그는 이미 얼마 전에 맡은 단기 임무에서 온종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무인 행성에 다른 가디언즈 멤버들과 꼬박 하룻밤 내내 갇혀 추위에 떨며 우주선의 잔고장들이나 수리하며 보낸 적이 있는 참이었다. 로켓은 임무 중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을 맞닥뜨릴 때마다 대개 그루트 혹은 아담의 신세를 지면서 이동하는 편이었지만, 그 당시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기에 마지못해 테란 폼으로 몸을 바꾸고 그가 아는 모든 체온 유지 방법을 찾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테란의 몸뚱이란 얼마나 괴상하고 비효율적인지! 낮은 온도의 환경에 내던져졌을 때 체온 유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고작해야 옷을 더 껴입거나, 휴대용 발열체를 갖고 다니거나, 근처 난방 시설을 손보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신체였다. 이 와중에 로켓의 테란 모습을 본 다른 멤버들이 “와, 그게 피터한테만 보여주는 ‘데이트 모드’ 맞지?”라고 건수를 잡고 놀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로켓은 한동안 “너네 나 없는 데서 이 모습에 그딴 거지 같은 이름이나 붙이고 있었냐?!”며 짜증을 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이 더 소모하고야 말았다. 그 임무 직후 독감 같은 것에 걸리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야, 설마 내가 너 신발 끈까지 묶어 줘야 하는 거 아니지?”
닫힌 현관문 너머로 퀼이 약간 짜증스럽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켓은 더 이상 퀼과 계속 옥신각신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건성으로 “그래, 나간다. 나가.” 같은 대답을 구시렁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마지못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실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싸늘한 겨울밤 공기가 온몸 곳곳에 마른 스펀지에 흡수되는 물처럼 스며들어 로켓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눈발이 굵긴 해도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비교적 얌전하게 내리고 있다는 것이 유일하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었다. 하지만 꽤나 굵은 눈송이들의 실시간으로 머리카락이나 뺨의 맨살 위에 닿아 녹아내리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소름이 끼쳐 로켓은 몇 번씩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하지만 퀼의 손은 아까 침대에서 그를 깨울 때와 마찬가지로 퀼이 그의 팔을 자비 없이 잡아끌었다.
“진짜 잠깐이면 돼.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그 말과 함께 퀼은 추위로 답잖게 어기적거리는 로켓을 데리고서 용케도 집의 마당을 잰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새의 발자국조차 없는 새하얀 눈밭 위에 뽀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명분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남았다.
퀼의 발걸음은 이 집의 정원 끝자락, 정확히는 마을의 큰 길목이 바로 보이는 자리에서 곧바로 멈췄다. 이 자식은 대체 뭘 보여주고 싶어서 이 난리인 거야? 로켓은 최근 퀼 앞에서 의식적으로 열심히 단속하고 있던 제 지옥의 주둥이가 이제 거의 열리기 직전 상태로 입꼬리가 사납게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젠장, 피터 퀼, 너 진짜 별거 아니기만 해 봐…”
“내가 언제 이런 걸로 거짓말하는 거 봤어?”
퀼은 천연덕스럽게도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하며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로켓의 등을 앞으로 가볍게 떠밀었다.
“봐, 여기 서 있으면 이 동네 모습이 엄청 잘 보이거든… 어때, 진짜 끝내주지?”
로켓은 퀼이 가리키는 손가락 너머로, 평소 늘 일관적이고 단조로운 모양의 마을 주택과 정원들이 크리스마스를 핑계 삼아 다양한 방식으로 꾸며져 개성을 뽐내는 것을, 그리고 그 위로 조용히 눈이 내리며 녹지 않고 쌓이는 찰나의 풍경을 포착하여 볼 수 있었다. 늦은 밤이라 대부분의 집이 장식된 조명의 조도를 몇 단계 낮추고 캐롤도 거의 꺼둔 듯이 보였지만, 여전히 충분히 밝고 화사하고 ‘크리스마스’스러웠다. 지금 퀼이 보여주는 풍경은 저번 크리스마스 때 드랙스와 맨티스가 테라의 가게에서 모조리 쓸어 담아 왔다는 크리스마스 엽서들에 그려진 그림, 혹은 스노우글로브 속 작은 모형들과 꽤 비슷했다. 크리스마스 쿠키 같은 장식들로 지붕과 정원과 울타리를 형형색색 치장한 장난감 같은 집들과, 설탕 같은 하얀 눈이 내리는 평화로운 마을 풍경……
그러나 로켓의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은 것은 그 몽환적인 풍경이 아닌, 하늘에서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로켓을 향해 전구를 켠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피터 퀼이었다. 퀼은 로켓을 향해 마치 여덟 살 아이처럼 웃으면서 양팔을 높이 치켜들고 이제까지 중 가장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로켓!”
로켓은 그제야 퀼이 조금 더 길이가 길고 두꺼운 외투와 아직 폭신함이 남은 따뜻한 새 목도리를 자신에게 양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에게 건네준 것보다 더 짧고 얄팍한 외투와 낡고 헤진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피터 퀼이, 코와 뺨과 귀가 추위로 온통 붉어진 채 뭐가 그리 좋은지 자신을 향해 이가 활짝 드러나게 웃고 있었다. 로켓은 그의 곱슬거리는 어두운 금색 머리카락 위에 녹지 않고 달라붙는 새하얀 눈의 흔적과, 크리스마스 트리와 꼭 같은 초록색 눈동자와― 하여튼 피터 퀼이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이 야외에 내걸린 크리스마스 조명들 사이에서 빛나는 것을 낯설고 황홀한 것을 목격한 듯이 넋을 놓고 응시했다. 그것은 로켓이 여태까지 알고 기억하고 있던 모든 겨울 풍경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였으므로.
로켓은 무언가 말하기 위해 무심코 입을 열었으나 다시 조개처럼 딱 다물기를 반복했다. 새하얀 입김이 목소리 대신 뿜어져 나오는 것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때 그 눈 뿌리는 허접한 기계를 더 손봤어야 했어.”
조금 긴 뜸 들임이 끝난 뒤에야 로켓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하얀 입김과 함께 마구잡이로 말들을 내뱉었다.
“테라의 눈이 이런 건 줄 알았다면, 내가 더 그럴싸해 보이도록 고쳐 놨을 거야.”
그의 말을 들은 퀼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나 싶더니, 곧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이 다시 한번 눈꼬리를 접어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보다는 조금 멋쩍은 기색이 담긴 미소였다.
“넌 가끔 정도를 너무 몰라서 안 돼. 노웨어를 온통 눈에 파묻히게 할 셈이야?”
“그치만 대부분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거긴 날씨라 부를만한 게 별로 없잖아.”
“그건 맞지만, 네뷸라는 엄청나게 싫어할걸.”
“……그건 진짜 반박할 수가 없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죽여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로켓은 손을 뻗어 퀼의 머리카락 위에 얇게 쌓여가는 눈송이들을 마저 치웠다. 꽤나 조심스러운 손길에 퀼은 낯간지러운 듯 몇 번 더 큭큭거리며 웃었다.
“내년에도 이렇게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네.”
퀼이 여전히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때도 잘 부탁해, 로켓.”
로켓 라쿤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구체적인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의 미래는 항상 ‘언젠가’,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만약 기회가 된다면’과 같이 불투명하고 막연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그마저도 소리 내어 말하는 상황조차 노골적으로 피하는 쪽이었다. 최초로 내걸었던 불확실하고 연약한 약속이 어떻게 무참히 박살 나 오랫동안 낫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는지를 이미 뼈아프게 겪어 보았으므로.
그런 로켓에게 피터 퀼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년을 기약하고, 그것이 어떠한 이변 없이 확정될 것이라는 듯이 말한다. 당장 내일, 아니 몇 시간 뒤의 날씨와 일정에 관해서 이야기하듯이. 그리고 이 우주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와 구체적인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이토록 가슴 안쪽을 간질거리고 울렁거리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로켓은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로켓이 겪어 보았던 모든 고통 중 가장 기꺼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
로켓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약속할게.”
퀼은 그 대답에 몹시 만족한 듯 씩 웃으며 로켓의 손을 붙잡았다.
눈이 그치기 전에 서둘러 나오느라 두 사람 모두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다. 로켓은 그 따스하고 단단한 다섯 개의 손가락 사이에 조그마한 빈틈이라도 생길까 두려운 듯이 얼른 자신의 손가락들을 밀어 넣으며, 조금 전 귀찮다는 이유로 장갑을 끼지 않기로 한 것이 이제 와서는 꽤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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