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tter Brew
카일리스
"받아."
어두컴컴하고 빛 한 점 없는 공간 속 접이식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리스는 다가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라이프였다. 좀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는 녀석이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건네 받기는커녕 멍청한 얼굴로 라이프를 올려다보자 라이프는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리스의 귀에 갖다 대고는 빨리 받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리스는 결국 치밀어오르는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에 몸을 굽힌 채 머리를 처박은 리스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속을 오랫동안 게워했다. 의사 음성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어댔고, 구역질은 자꾸만 올라왔다. 머릿속에 박혀있는 종양은 수술할 경우 생존확율이 75%가 넘는단다. 그래서, 그 다음은? 종양을 아무리 도려내고 또 도려낸다 한들 억울하게 희생된 동료의 얼굴은 리스의 머릿속 안에 남아 잊을 수 없는 각인으로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상태였다. 두 명도, 리스의 가족도, 동료도, 살아갈 이유 조차도. 이 비극의 시작은 이깟 양성종양 하나때문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사라져버렸으니까. 모잠비크에서 하루하루 의미 없는 생을 연명해가던 리스는 당연하게도 수술을 거부했지만, 라이프는 단호했다. 허락도 없이 멋대로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것이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라이프는 정말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시무시한 야차의 얼굴로 협박했고, 거부에서 승낙으로 리스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매일매일 괴롭혀댔다.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찍어 눌러야 했다. 군에선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일단 살고 생각해보라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정확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방법을 바꾼 라이프는 또다시 군에서 허튼짓하지 않도록 리스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 말엔 먹힌 모양인지, 리스는 마지못해 백기를 흔들었다. 리스나 라이프나, 정말이지 지독한 군인 새끼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리스는 더욱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고, 잠이 오지 않아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다가도 어느 날은 죽은 듯이 잠만 자기도 했다. 멍하니 온종일 생각에 잠겨 앉아 있다가도 끓어오르는 분노에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기도 하고 몸에는 너덜너덜한 상처를 남겼다. 리스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사람처럼 엉망진창으로 굴었다.
불빛도 없이 폐허가 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아무런 생각 없이 허공을 쳐다보기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두통에 리스는 오른손을 들어 오른쪽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통을 삭여냈다. 때마침 현관문에서 때려 부서지는 듯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권총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본 리스는 곧이어 엉망진창이 된 거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살아보려는 의지도 없으면서 권총을 찾기는. 스스로의 모순에 실소를 터트린 리스는 결국 권총은 찾지 못한 채 일어섰다. 또다시 부셔 저라 두들기는 소리에 겨우 몸을 움직여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달칵, 하고 도어락을 열자 새어나오는 햇살에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몇 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거구의 라이프가 저를 내려다본다.
"아깝네. 두 번만 더 쳤으면 문을 부술 수 있었는데."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입꼬리만 겨우 올려 웃어주자 라이프는 팔꿈치로 리스의 명치를 가볍게 친 다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왔는데 소파 하나 없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리스는 어깨를 으쓱할 뿐. 거실로 들어선 라이프는 엉망이 된 바닥을 발로 대충 치우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는 크래프트 봉투를 내밀자 무의식적으로 받아 든 리스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식어 빠져 눅눅해 보이는 햄버거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리스는 햄버거를 꺼내 바닥에 앉아있는 라이프에게 하나를 건네고는 나머지 하나는 포장지를 펼쳐 기계적으로 입에 욱여넣었다.
"야이새끼.. 너 지금 뭘 먹고 있는지나 알아?"
"햄버거?"
"그래, 햄버거. 무슨 소스가 들어갔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소스가..있었어?"
이제는 미각도 맛이 갔군. 라이프는 그대로 일어나 리스의 손에 들려진 햄버거를 낚아채 봉투에 도로 욱여넣었다. 정신상태가 어느 정도로 안 좋은 지 가늠할 수 없어 테스트용으로 마요네즈 소스가 들어있는 햄버거를 주문했다. 라이프는 당장 그 날로 트라우마 치료 예약을 잡아두었다. 라이프는 이 정도쯤은 알아서 할 테니 개입하지 말라고 으르렁거렸지만, 이번에도 라이프는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기어코 트라우마 치료 첫날이 다가왔다. 심지어 그룹치료였다. 제 사정을 알면서도 그룹치료라니 하여간에 고약한 성격은 알아둬야 했다. 혹시라도 다른 길로 샐까 뒤에서 쫓아오는 지프카에 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센터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음 시동을 끄고 나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갖다 대고는 지프카는 그렇게 사라졌다. 오두막도 아닌 막사도 아닌 멀쩡한 건물 안으로,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스스로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처럼.
상담실 문 앞에 선 리스는 우뚝 멈춰 섰다. 마치 잘못한 일이 있어 혼나기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머리가 아파져 오고 온몸이 굳어져만 갔다. 머리는 원래 아팠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결국 손잡이를 잡지 못한 리스는 포기하고 뒤돌아서려는 찰나,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제임스리스 님 맞으시죠?"
예. 상담사로 보이는 중년 여성분의 물음에 짧게 대답한 리스는 상담실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첫날이어서 그랬을까
그룹치료라는 것은 제가 걱정한 것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각자의 이름을 말하고,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조금씩 고해성사했다. 무엇보다 같이 상담받는 이들은 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손을 마주 잡아왔다.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첫 수업이 간단하게 끝이 났다. 이게 뭐라고 그토록 긴장한 것일까. 리스는 공허한 마음에 한동안 센터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리스는 평생 목표 없는 삶을 살아온 법이 없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은 바다 위에 정처 없이 떠도는 부표 같았다.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수술을 받아서 몸이 고쳐진 다음은,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죽는 결단도 살아가는 결단도 하지 못하는 듣고 있던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정녕 살고 싶은 걸까. 답지 않게 생각이 깊어진 리스는 센터 주변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문득 카페 간판에 발걸음을 멈췄다. 커피가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커피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듣고 있던, 그 일이 생긴 후로는 어느 새부터인가 일상과도 같은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커피를 들이켜는 순간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카페 앞에 있으니 저를 반기듯 자동문이 저절로 열려왔다. 저도 모르게 카페 안으로 들어간 리스는 캡모자를 고쳐 쓰고는 카페의 처박은 서서 메뉴판을 교과서 읽듯 하나하나 훑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늘 마시는 커피는 이곳에 없다.
"이 카페는 바닐라라떼가 맛있습니다."
크리스 카일 중사입니다, 소령님.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아보자 그는 통성명을 하며 짧게 인사했다. 크리스 카일. 이름을 곱씹었다. 군인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리스는 한때 그를 제 팀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을 만큼 눈여겨보고 있던 인재였으니까. 그 또한 이미 저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하긴.. 모를 수가 없지. 속으로 냉소를 터트린 리스는 대수롭지 않은 척 카일을 보고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카페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찾고 있는 메뉴가 없어서.. 알려줘서 고맙네."
"예. 아메리카노, 시원한 것으로 주십시오."
뇌 속을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카일을 바라보던 리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바닐라라떼를 추천했으면서, 정작 시키는 메뉴는 아메리카노란 말이지. 재미있는 양반이다 생각했다. 드르륵 하며 로스트한 원두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리스는 뒤돌아서 카페를 나섰다.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찰나 "소령님"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담 치료라는 게 별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커피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짧게 거수경례를 한 카일이 뒤돌아섰다. 미련이 없어 보이는 제 속마음을 읽은 듯 구는 카일의 모습에 리스는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날을 시작으로 카일은 그룹치료가 끝나는 저를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센터에서 PTSD에 힘들어하는 퇴역군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전역한 몸이긴 했지만, 아직도 국가와 군에 대한 자부심도 꽤 있는 편이었다. 국가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에 대항했던 제 모습이 드리워졌다. 충분히 저를 안 좋은 시선으로 볼 법한데도 카일은 내색도 하지 않고, 그 일에 대해서 일절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꽤 참을성이 있는 성격인 듯 했다. 카일이 저에게 다가와 하는 말이라고는 어제 뭐 먹었는지, 센터는 잘 왔는지 정도였다. 그때마다 리스는 짧게 대답만 해주었을 뿐이다. 카일의 정성에도 리스는 그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다행인 점은 카일또한 안부를 묻지 않은 리스를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지만.
물론 센터에서 저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카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짧은 대화,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리스를 가까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묘하게 벽이 느껴졌다. 아직 나라에서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인간이란 복잡한 일에 엮이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특히나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카일은 아주 조금씩, 제가 불편하지 않도록 거리를 좁혀오려는 것을 느꼈다. 제지해야 할까. 불편하기도 했고, 이상하게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했다. 카일의 관심이 아니었으면 리스는 진즉 이 치료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실하게 센터를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각종 병원 검사로, 컨디션을 핑계로 2주, 3주 만에 방문한 날이었다. 치료가 끝난 뒤 느릿한 걸음으로 센터 로비로 나서자 소파에 앉았던 카일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제게 걸어와 짧게 거수경례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소령님"
"응. 잘 지냈나."
"예."
언제나와 짧은 대답이었지만 카일은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괜스레 느껴지는 낯간지러움에 리스는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물론 카일도 리스의 소문과 그 행적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 흔들어 놓은 게 바로 얼마 전이었다. 처음 뉴스로 그의 소식을 접한 카일은 실망보다는 놀라움이 먼저였다. 비록 같은 소속은 아니었지만 같은 콜로라도에 있으면서 오며 가며 스쳐 본 그의 눈동자는 매우 또렷했고, 인성은 귀감이 되었으며 누구라도 그 앞에 있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만큼 리더십도 포스도 대단했다. 이미 그의 업적과 행실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터였다. 그러니 세상에서 그에게 떠들어대는 것이 전부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의 인성을 보아오건데 이런 참상을 벌인대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렇다고 그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군 간부의 행동이 네이비씰 전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카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꿇으라면 꿇어야 하고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곳이 군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잘잘못을 먼저 따지기에는 섣부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비극적인 일이 지나간지 얼마 안 됐을때, 제 앞에 나타난 리스는 마치 죽기 직전 날짜를 받아둔 산송장처럼 보였다. 두 눈에 담겨있던 생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멀리서봐도 듬직해보였던 그는, 왜소하고 또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살리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총을 겨누었던 저가 사람을 살리고 싶어한다니,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졌지만 아무렴 괜찮았다. 때로는 리스에게 먼저 말을 붙여오는 저에게 그렇게 가깝게 지낼 필요는 없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려면 상관 없었다. 카일은 원래 마음이 가면 가는대로, 하고싶으면 하면서 살았으니까.
"그..소령님이 말씀하신 그, 카페에 없는 메뉴 말입니다."
"응."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 리스는 엷은 웃음을 띄웠다. 한때는 매일 아침마다 마시던 그 커피. 생각해보니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상기 시켰다. 음.. 머릿속에서 짧게 생각을 마친 리스가 입을 열었다.
"마일드하게 로스팅한 원두로 커피를 추출하는 것부터 시작해. 꼭 마을에서 나는 꿀. 그 꿀을 세심하게 녹인 다음, 적당량의 크림을 넣으면 되는.. 그런 레시피야."
"확실히 카페에서는 팔지 않는 커피군요."
"오랫동안 그렇게 마셔왔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니 요즘은 커피 자체를 안 마신 지 제법 오래됐어."
"그래도 말만 들어도 맛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커피맛은 잘 모릅니다만"
하하 소리내서 짧게 웃은 카일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리스가 생각하기에도 카일은 입맛도 무던하고 딱히 가리는 임맛이 아니라는 짐작을 해왔던 터였다. 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 받은 모양인지 아무 커피나 받아들고 홀짝대는 카일을 종종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리스는 입을 여는 대신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센터에서의 첫 만남을 회고해본다. 커피도 잘 모르고, 말 주변도 없는 사람이 커피메뉴까지 추천하며 말을 붙여왔다는 자체가 큰 용기였을 것이다. 이후로는 말을 걸어오는 카일의 인사가 더는 거슬리지가 않게 되었다.
수술일정이 잡힌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아무리 가벼운 수술이라 할지라도 머릿속을 연다는 건 여러 부상을 겪은 리스마저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전처럼 회복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수술이 머지않았기에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도 다시 해봐야 하고, 수술하면 한달 이상은 입원해야하고 몇 달은 병원에서 지내야 할 수도 있었으므로 짐도 챙겨야 한다. 그렇기에 그룹치료는 오늘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리스는 센터의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커다란 트리를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알록달록한 빛을 낸 로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에 방문했던 센터는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치료실 앞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 웃고 있는 카일이 보였다. 이제 안부를 물어오는 저 얼굴도 오늘로 마지막일 것이다. 그래서 리스는 오늘따라 먼저 카일에게 말을 걸고만 싶어졌다.
"중사,"
"안녕하십니까."?
"치료는 오늘까지만 받기로 했어. 수술을 해야되서."
"아..... 그렇군요. 그 종양 말씀이시죠."
"알고 있네?"
"온 세상이 떠들썩했잖습니까."
"응, 잘 지내고. 그동안 챙겨줘서 고맙네."
"인사만 했던 것 뿐인데요. 뭘"
"자네 덕분에 기운이 났어. 생각보다 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고백할 게 있습니다."
괜스레 꽉 쥔 손에는 땀이 흐르고 입에는 침이 고였다. 고백이라니,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별 건 아니었다. 그저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 해본다는 게 카일의 심정을 긴장시켰을 뿐이다. 목울대를 삼킨 카일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존경해왔습니다. 영광이라, 저도 모르게 자꾸 말을 걸었습니다. 원래 이런 사람 아닙니다."
긴장된 분위기를 무마하듯 하하 웃으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영광이라, 순간 리스는 저에게 더이상 영광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인가 돌이켜보았다. 아직까지도 나를 존경해주는, 바로 눈앞에 있다니. 괜스레 눈가가 붉어지는 듯했다. 나야말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몸과 마음이 아프니까 청승맞아지는 것 같았다.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기분이 언짢았다고 오해한 모양인지 카일은 불안한 눈길로 리스를 살폈다. 조금, 귀여운 구석도 있군. 리스의 다물린 입에서 희미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고맙네, 나중에 회복되면 한 번 들르겠네."
카일은 거수경례 대신 내밀어 진 리스의 오른손을 꼭 잡았다. 따뜻하고, 단단하고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짧은 악수를 한 리스는 곧장 뒤돌아서 걸어나갔다. 그렇게 돌아선 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은 문득, 쓸쓸해 보이는 그의 등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복잡하게 얽혀있던 제 마음을 알아차리자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져가는 리스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득 참을 수 없을 만큼 용기가 솟아오른 카일은 재빠르게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 마음이 동경인지, 그의 인생을 어여쁘게 여기는 측은함인지,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인지 비록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제 쪽으로 달려오는 인기척을 느낀 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일을 응시했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르는 카일을 기다렸다. 숨이 찬 것이 아니라, 할 말을 고르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소령님"
"그래."
"저도 마시고 싶습니다. 그.. 소령님이 말씀하신 꿀과 크림을 넣은 커피를요."
"미안하지만 그 커피는 어느 카페에서는 팔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카일은 짧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뒤돌아서려는 찰나, 리스는 카일의 한쪽 어깨를 살며시 그러쥐었다. 새파란 동공이 저를 향해 크게 열렸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간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지그래."
"부담 드리려고 했던 말은 아닙니다."
커다란 덩치를 하고 안절부절 눈치 보는 모습 또한 새삼 귀엽게 느껴져 엷게 미소를 띄웠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카일은 표정에서 감정이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하고싶은대로 행동하고. 그런 주제에 잘도 명사수를 했겠다. 오랜만에 리스는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일었다.
"바람이 차. 집에 가면 따듯한 커피를 대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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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행복하세요....
W. 방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