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로켓퀼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정도 남겨 놓은 오늘, 어느덧 그럴듯하게 지구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피터 퀼은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방 안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중이었다. 어제는 할아버지께서 다 커버린 손자와는 처음 보내는 크리스마스인 만큼 지인들과 미리 시간을 보내겠다며 근교의 별장으로 떠나신 날이었다. 그간 동네에서 잔디깎이와 울타리 칠하기 같은 소일거리들을 맡아 하였으나, 큰 명절을 앞두고 있는만큼 퀼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 집에 남아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지긋지긋할 지경에 다다른 퀼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곤 밖이라도 나갈까 고민하던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그나마 자주 왕래하던 옆집 부부는 친척들과 시간을 보낸다며 집을 비운 지 벌써 며칠째였다. 아직까진 집으로 찾아올 만큼 친해진 사람이 없었기에 퀼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질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에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케빈 베이컨이 들어있던 박스와 유사한 형태의 선물 상자가 놓여있었다. 크기는 더 작았으나 지난번의 일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퀼이 박스를 노려보고 있던 차에 마침 타이밍 좋게도 후드 주머니에 들어있던 통신기-우주와의 통신이 원활해지려면 지구의 스마트폰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로켓이 주고 간 이 통신기로 연락을 주고받는다-에서 문자 알람 소리가 울렸다.
[피터 널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 즐거운 시간 보내 :) -M]
맨티스가 선물이라고 하니 더욱 불안해진 퀼은 머뭇거리는 손길로 박스를 감싸고 있는 리본을 잡으려던 순간 선물 상자의 뚜껑이 위로 날아가더니 로켓이 펄쩍 뛰어나왔다.
"좁아터진 박스에서 기다리느라 죽을 뻔했네. 야 피터 퀼 잘 지냈냐?"
"깜짝이야!! 로켓? 네가 어떻게 여기에..."
***
그러니까 로켓이 퀼의 깜짝 선물로 어떻게 지구까지 오게 되었냐 하면… 퀼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은 퀼이 지구에 간 뒤에도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왔다. 이제는 홀로 헤엄치는 방법을 배우겠다며 여러 행성을 떠도는 맨티스와도 당연히 연락은 이어갔다. 더군다나 퀼이 지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아직 어색한 지구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탓에 동료이자 친구이며 하나뿐인 제 여동생 맨티스에게 투정 섞인 문자를 보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는 그들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이번 일도 퀼이 할아버지께서 일주일간 자리를 비워 난 뭐 하고 놀지 모르겠다는 시답잖은 문자를 가볍게 보낼 수 있게 된 덕분에 벌어진 것이었다.
아무튼 맨티스는 우연히 들른 노웨어에서 네뷸라를 통해 작년처럼 크리스마스를 모두가 즐기기 위해 마을 주민들도 자신의 친구들도 많은 것을 준비하느라 바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쪽에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다리에 달라붙는 아이들을 놀아주는 드랙스와 높은 곳에 전구를 설치하는 그루트 그리고 무언갈 포장하고 있는 아담까지 확인한 맨티스는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로켓의 행방을 물었다.
"네뷸라, 로켓은 어디에 있어?"
"그 녀석 지금 노웨어에서 어떻게 해야 많은 주민들과 안전하고 즐겁게 크리스마스를 보낼지 구상하느라 아주 머리털 빠지게 고민하고 있어. 지금 며칠째 방안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크리스마스만 찾아보고 있다니까?"
그동안 로켓과 이 문제로 말씨름을 해왔던 것인지 이마를 짚으며 말하던 네뷸라의 이야기를 들은 맨티스는 얼마 전 퀼과 주고받았던 문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그 일 혹시 다른 사람이 맡을 수 있을까?'라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이에 네뷸라는 당연하다는 말과 함께 '사실 구상은 로켓이 다 해뒀으며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아직도 저러고 있는 것'이라 대답했다. 맨티스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로켓을 피터에게 선물로 주자!"
맨티스에게 퀼의 사정을 들은 네뷸라는 다른 이들을 불러 모았고 그렇게 맨티스를 중심으로 네뷸라와 드랙스, 아담과 그루트까지 한데 모여 '어떻게 해야 로켓을 테라까지 멀쩡하게 데려갈 수 있을까'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냥 말로 설득하는 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네뷸라의 의견에 드랙스는 잠깐 기절시키자고 시원스럽게 소리쳤다.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게 한다면 중간에 깨어날 수 있으니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자 그루트는 자기가 꽁꽁 묶어두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담은 그냥 맨티스가 로켓의 감정을 조절하여 퀼의 깜짝 선물로 얌전하게 테라까지 가도록 만드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미 저번 서프라이즈 선물도 같은 방식으로 납치했었기 때문에 과연 이를 알고 있는 로켓이 순순히 당할까 싶었던 네뷸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맨티스를 보았다. 그러나 맨티스는 두 주먹을 쥐고는 좋은 생각이라며 아담을 칭찬한 뒤 이를 바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로켓의 방으로 향했다. 일주일 넘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로켓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순식간에 이마에 닿은 맨티스의 손길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자의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빨간 선물 포장용 리본 장식까지 왼쪽 가슴에 매단 채 제 발로 우주선에 올라탔다. 이렇게 로켓은 머나먼 노웨어에서 지구까지 퀼의 서프라이즈 선물로 오게 된 것이었다
.
***
당황한 표정의 퀼을 보고도 그저 호탕하게 웃던 로켓이 자연스럽게 퀼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뭐..뭐라더라? 내가 니 선물이라고 하던데?'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원이 나간 로봇마냥 조용하게 눈만 깜빡이더니 갑자기 주변을 휙 둘러보곤 비명을 내질렀다. 맨티스의 문자, 작년 크리스마스의 케빈 베이컨 그리고 로켓의 다이나믹한 태도 변화를 보며 퀼은 자신의 친구들이 로켓을 보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금은 과격하지만, 그들의 애정이 듬뿍 담긴 서프라이즈 이벤트에 퀼은 속으로 웃음 지으며 로켓을 바라보았다.
"여긴 테라잖아! 내가 왜 니네 집에 있는건데!"
"애들이 선물이라고 너 주고 갔어 가슴쪽 봐봐 리본도 있던데?"
로켓의 외침에 퀼은 손에 있던 통신기의 화면을 보여주며 가볍게 흔들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채로 자신의 가슴을 확인한 로켓은 별 우습지도 않은 조잡한 리본이 붙어있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떼내곤 급하게 퀼의 손에 들린 통신기를 낚아챘다. 그는 곧바로 네뷸라에게 연락하였으나 [로켓, 솔직히 네가 하던 일 3일이면 끝낼 수 있는데 붙잡고 있던 거 너도 알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피터랑 잘 쉬고 와. 그때까지 니 연락 안 받는다] 라는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겨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로켓은 이미 꺼진 화면만 바라보더니 어차피 여기까지 와버린 마당에 더 고민할 게 뭐가 있나 싶었는지 들고 있던 통신기를 퀼에게 던지며 소파에 앉았다.
"나야 뭐 테라는 잘 모르니까 네가 하는 데로 따라갈까 하는데 피터 퀼 넌 가고 싶은 데 없어? 너 할아버지 안 계신다고 심심해서 뭐 할지 모르겠다며 맨티스가 그러던데 여기서 친구들이랑 하고 싶었던 건 없었어?"
괜히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길게 늘어놓는 로켓을 보며 퀼은 '그냥 너랑 같이해보고 싶었던 게 있긴 한데...'라고 운을 띄우고는 녹색의 눈을 반짝이며 로켓을 마주 보았다.
***
장난스러운 눈길로 로켓을 바라보던 퀼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로켓과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먼저 말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퀼은 이번에도 즉흥적인 저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마침 집에 시리얼도 다 떨어졌겠다 우선 로켓이랑 같이 지내며 먹을 것들을 좀 사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옷장에서 패딩을 꺼냈다. 퀼에게 하고 싶은 것을 물어보던 로켓은 그때까지도 소파에 앉은 채로 퀼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로켓을 보니 괜히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로켓 우리 마트 가야 해 근데 우리 동네가 워낙 좁아서 말하는 라쿤이 있다고 하면 소문이 쫙 퍼질 게 분명하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내 패딩 안에 들어가는 건 어때?"
귀를 쫑긋거리며 퀼의 말을 듣던 로켓은 버럭 화를 내며 반대하였으나 퀼이 어느새 걸쳐 입은 패딩 안쪽을 보여주며 밖은 춥고 이 안이 얼마나 따뜻한지 너는 모른다며 잠깐인데 그냥 이렇게 다녀오자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퀼에게 넘어간 로켓은 영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퀼에게 안겼고 퀼은 한쪽 팔로 로켓을 안고는 지퍼를 잠그고 밖을 나섰다.
"이거 어때? 페퍼로니랑 시금치가 토핑이래"
"그건 또 무슨 조합이야 옆에 건 뭔지 좀 가까이서 보자"
두꺼운 패딩의 지퍼를 살짝 내리고 있던 퀼은 자신의 몸을 냉동식품이 진열된 냉장고 앞으로 가까이 댔다. 패딩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냉동 피자의 포장을 유심히 살펴본 로켓은 결국 퀼이 말한 피자를 선택했다. 카트를 끌며 퀼이 자주 먹는 시리얼과 우유, 끼니를 때우기 위한 각종 냉동식품과 간식거리까지 산 둘은 즐겁게 집으로 향했다. 물론 로켓도 생각보다 퀼의 품이 따뜻해서 이 경험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나랑 하고 싶었다는 게 이거야? 마트 다녀오기?"
"음... 아니! 맞긴 한데, 아직 더 있어 설마 일주일이나 같이 있을 텐데 이것만 하게? 로켓 네가 아까 그랬잖아 너는 테라를 잘 모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그러니 나만 믿어."
콧노래를 부르며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던 퀼은 어느새 전자레인지 안에서 조리가 완료된 라자냐를 꺼냈다. 냉동식품이었지만 준비된 그릇에 옮겨 담으니 꽤나 그럴듯한 저녁 식사가 되어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를 서로 떠밀며 투닥거리던 그들은 결국 먹는 건 내가 만들었으니 치우는 건 네가 하라며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린 퀼로 인해 마무리되었다. 로켓이 구시렁대며 뒷정리하는 사이 퀼은 침대 위에 배드테이블을 펴놓고는 노트북으로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었다. 최근 그는 예전처럼 디비디를 대여하는 것 대신 매달 돈을 내고 원하는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서 클릭만 하면 웬만한 영화는 쉽게 볼 수 있다는 편리함 덕분에 종종 즐겨 찾았는데, 오늘은 로켓과 함께하는 날인 만큼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할 계획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로켓에게 침대 위에 잠깐 앉아있으라고 말한 퀼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커다란 그릇에 팝콘을 잔뜩 담고 음료도 챙긴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영문을 모른 채 침대에 앉은 로켓에게 퀼은 자기 전에 이거 먹으면서 영화나 같이 보자며 순위권에 있던 액션영화 하나를 틀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눕기에도 넉넉한 침대 사이즈에 로켓은 편하게 등을 기대고 영화에 집중했다. 방 안은 작은 조명으로 인한 아늑한 분위기와 고소한 팝콘 냄새로 가득했다. 그리고 제 옆에 몸을 기대고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퀼을 보니 로켓은 새삼 지금 이 순간이 편안하다는 것을 느꼈다.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밤이 깊어져 갔다.
***
다음 날 아침, 알람도 맞추지 않은 채 잠들었던 로켓과 퀼은 눈이 잔뜩 쌓인 밖을 마주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확인한 퀼은 잔뜩 신난 상태로 옷을 주워 입고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로켓 역시 털이 눌린 채 호들갑을 떠는 퀼 옆에서 같이 밖을 내다보고는 꼬리를 살랑거렸다. 로켓! 나 먼저 나가 있는다? 어린아이 같이 신난 퀼의 모습이 퍽 귀여웠던 로켓은 대충 대답해 주고는 창밖의 풍경을 좀 더 지켜보며 기지개를 켰다. 로켓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눈이 아닌 테라에서의 진짜 눈은 처음 보는 것이라 속으로는 꽤 신나있었다. 로켓이 현관문 밖으로 나오자 이를 기다렸던 것인지 바로 눈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지금 해보자는 거냐?"
"어디 한번 덤벼보시지"
눈덩이 하나로 시작된 눈싸움은 금세 격렬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싸움은 로켓이 지붕 위에 올라가 눈 무더기를 퀼에게 뿌리고서야 마무리되었다. 눈을 다 털어내고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퀼은 갑자기 대왕 눈사람을 만들어보겠다며 정원 한 구석에서부터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로켓은 어차피 부서질 거 왜 만드냐며 한 소리 할까 싶었지만 눈을 굴리는 뒷모습만 봐도 퀼이 즐거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그저 팔짱을 끼고 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나 큰 눈사람을 만들려고 그러는지 퀼은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가 걸리적거린다며 로켓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목에 목도리를 야무지게 매어주고는 돌아갔다. 로켓은 괜히 목도리만 만지작거리다가 코끝에서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퀼의 향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눈사람을 거의 다 만든 퀼이 팔로 쓸 나뭇가지를 찾고 있자 로켓은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 두 개를 건네며 이걸로 하자고 말했다. 눈사람과 사진까지 찍고 난 뒤에서야 지쳤는지 퀼이 눈이 쌓인 바닥에 털썩 누웠다. 로켓도 옆에 나란히 누워 맑은 하늘의 구름만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에취-'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켓은 재채기를 한 뒤 코를 훌쩍이는 퀼을 보고는 그를 일으켜서 집으로 들어갔다.
"너 먼저 씻을래?"
"야 기다리다 감기 걸리겠다. 그냥 후딱 같이 씻지 뭐"
들어오면서 이미 점퍼를 벗어던졌던 퀼은 땀과 눈이 녹은 물로 젖어 잘 벗겨지지 않는 티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로켓은 괜히 시선을 회피하고는 아냐 너 먼저 씻어라 난 기다릴게 라며 뒤를 돌았으나 그가 방심한 틈을 타 퀼이 로켓을 덜렁 품에 안고 욕실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에이- 우리 사이에 그냥 빨리 씻자-"
버둥거리는 로켓을 욕실 바닥에 내려둔 퀼은 샤워기를 들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너 안 씻고 계속 그러면 내가 씻겨버린다?"
샤워기를 들지 않은 손으로 간지럼을 태우는 듯한 시늉을 보여준 퀼은 샤워 타올과 바디워시를 로켓에게 건네곤 세면대에서 먼저 씻기 시작했다. 로켓은 그런 퀼을 잠시 보다 말고는 타올에 거품을 내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니 몸이 나른해진 퀼은 새 옷을 꺼내다 말고 탄식했다.
"맞다. 지금 너 사이즈에 맞는 옷이 없는데 어쩌지? 아니면 혹시 테란 형태로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 옷 옆에 두면 알아서 입을게"
퀼은 집에서 편하게 입을 널널한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로켓의 옆에 두고는 아까 벗어던진 옷들을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는 소파 앞에 미니 난로를 틀어두고 앉은 뒤 큰 담요를 목 끝까지 덮었다. 그새 방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로켓은 퀼의 옆자리로 가 담요를 덮고 앉았다. 꽤 오랜 시간을 차가운 눈밭에서 구른 터라 둘은 조금 지쳐있었다. 여기에 퀼이 놓아둔 난로 덕분에 소파 주변은 은은하게 따뜻했다. 잔잔하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를 들으며 둘은 서로에게 기댄 채 단잠에 빠져들었다.
***
로켓이 테라에 온 지도 벌써 3일째였다. 어느새 그는 퀼의 집에서 지내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오늘은 가볍게 집 근처 산책을 해보자는 퀼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로켓은 퀼의 옷을 빌려 입기 위해 인간의 형태로 몸을 바꾸었다. 다행히 옷의 사이즈가 잘 맞았던 터라 손에 잡히는 대로 입은 뒤 그들은 밖으로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산책이 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동네에는 퀼을 아는 사람이 많았고 자신들이 지나가다 누군갈 마주하면 다들 '헤이 퀼 옆엔 누구야?'라는 질문이 빠지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퀼은 이쪽은 내 애인이라며 소개시켜 주었는데 이 행동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할 때쯤엔 로켓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제이미 이쪽은 내 애인... 어! 로켓 잠시만 이것 좀... 제이미 미안 다음에 말해줄게!"
결국 비정기적으로 했던 파트타임 잡에서 만난 친구라는 제이미에게 자신을 소개하던 퀼의 팔을 잡아챈 로켓은 말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퀼은 조금 전부터 로켓이 영 불편해한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챘다. 하지만 평소 혼자 아니면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던 퀼이기에 동네 사람들에게는 지금 상황이 시선을 끌었던 모양인지 사방에서 자꾸 로켓이 누구냐고 물어왔다. 대답을 얼버무리기엔 자신의 애인이 떳떳했던 퀼은 그걸 다 대답했고, 결과는 이렇게 그 애인에게 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로켓 미안 내가 너무 불편하게 했지? 나도 이렇게 주목받을 줄은 몰랐어"
"... 너 친한 사람 없다며"
"저 사람들 다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야. 개인적으로 연락을 할 만큼 친한 사람은... 아까 본 두어명이 전부인걸"
그제야 로켓은 자신이 너무 퀼을 몰아세운 것 같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퀼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고 걸어가면서 로켓은 꾹 다물었던 입을 떼었다.
"질투 난 건 아니고 그냥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니까 어색해서 불편했던 것뿐이야. 미안해"
그때 어느 패스트푸드점 문 앞에서 새어 나오는 맛있는 냄새가 로켓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빠르게 걷던 로켓이 갑자기 멈추자 그의 등에 살짝 부딪힌 퀼은 고개를 들어 간판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잡혀있던 팔을 빼내 로켓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얼결에 햄버거를 먹게 된 로켓은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퀼 옆에서 같이 주문을 마쳤다.
식사 시간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매장 내부엔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구석 자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은 둘은 늦은 점심을 느긋하게 즐겼다. 햄버거의 맛은 어떠냐는 물음에 먹을 만하다며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로켓을 퀼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뒤 퀼은 후식이라며 아이스크림까지 시켜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떠먹고는 이곳의 아이스크림은 자신이 9살 때 먹었던 맛과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면서 신나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퀼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로켓은 퀼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천천히 먹어 다 먹고서 내 것도 먹든가"
퀼은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먹던 아이스크림을 마저 비우고는 휴지로 입을 닦았다. 음료를 마시고 있던 로켓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눈썹을 한번 들어 올렸다. 퀼은 가끔씩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로켓에 설레어 뚝딱거리곤 했는데 지금도 오랜만에 제 입술을 훑는 손길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쭈뼛거리고 있었다. 퀼은 분위기를 다시 자연스럽게 돌리기 위해 말을 건넸다.
"로켓 너는 더 안 먹어? 그러면 우리 저기 공원이나 잠깐 걸을래?"
예전에는 그저 풀숲이었던 이곳은 그사이 넓은 공원이 되어있었다고 퀼은 말했다. 자신이 지구에서 떠나있던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다. 제가 자주 뛰놀던 놀이터가 있던 자리에는 슈퍼마켓이 들어섰지만,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집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원히 적응 못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지구 생활도 그럭저럭 잘 해내는 중이었다. 이제 퀼은 제 옆에 앉은 로켓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변화 끝에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되었다. 퀼은 연인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퀼이 점점 깊은 생각에 빠져들 때쯤 옆에서 입김을 불던 로켓이 퀼을 불렀다. '슬슬 추워지니까 집으로 돌아가자' 로켓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은 오래 사귄 연인들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
벌써 휴가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로켓에겐 이미 지난 6일이 충분히 재밌고 의미 있는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퀼은 마지막 날인 만큼 특별한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간간이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곤 했었다. 그는 며칠을 끙끙대더니 드디어 결정한 건지 트리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사실 퀼이 어떤 것을 제안하든 좋았던 로켓은 당연히 알겠다고 응했다. 그들은 트리가 위치한 번화가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듯 버스에 올라탄 퀼은 로켓의 몫까지 요금을 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새 눈에 익은 풍경들을 지나 조금 낯선 거리가 모습을 보일 때쯤 퀼은 로켓의 귓가에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는 하차 벨을 눌렀다.
먼저 이곳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을 선택한 둘은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주변을 구경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어서 그런지 트리뿐만 아니라 수제품들을 직접 판매하는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소품부터 나무로 제작된 소형 가구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제품에 로켓은 흥미가 생겼는지 그곳에 자꾸 눈길을 주고 있었다.
"우리 여기부터 천천히 구경해볼까?"
"피터 너도 괜찮다면 좋아"
나란히 걸으며 양옆으로 놓인 부스들을 구경하던 로켓과 퀼은 중간에 위치한 푸드 트럭에서 간식도 먹어가며 그 시간을 즐겼다. 주변을 둘러보던 퀼은 수많은 물건 사이에서도 무언가 유심히 보는 듯한 로켓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퀼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로켓은 흠칫 놀라서는 퀼이 있는 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왜? 뭐 말할 거 있어?"
"아니 그냥 뭘 그렇게 보나 궁금해서"
가볍게 대답하는 퀼의 말에 로켓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으로 향해 갔다. 트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플리마켓의 구경을 마치고 그들은 원래 본 목적이었던 트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만큼 거대한 트리를 가까이서 보니 정교하게 만들어진 오너먼트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로켓은 트리를 구경하는 퀼을 보며 이곳에서 제일 반짝이는 것은 눈앞에 있는 제 연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트리가 보이는 곳에 있는 벤치에 앉은 둘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트리 위에 하나둘씩 들어오는 전구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불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들을 보는 것과 같았다. 오랜만에 우주의 하늘을 떠올리고 있던 퀼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로켓의 목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더니 퀼에게 건넸다. 주먹을 쥔 큰 손이 퀼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은 것은 한손에 들어갈 만큼 작은 인형 키링이었다. 크리스마스라고 빨간색과 초록색의 줄무늬가 그려진 모자를 쓴 인형은 조금 우스꽝스럽게 웃고 있었다. 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로켓이 선물을 줄 것이라고 생각 못 했는지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지던 퀼이 멈칫하더니 오늘 하루 종일 하고 다녔던 목도리를 풀어냈다. 그는 로켓에게 부드러운 손길로 목도리를 둘러주며 말했다.
"저번에 눈싸움할 때 말이야 내가 눈사람 만들다 말고 이거 너한테 해줬었잖아"
"응"
"그때 너는 몰랐겠지만 내가 목도리를 매주니까 귀가 쫑긋 움직이더라. 꼬리도 살랑거리고 뭘 이런 걸 하냐면서 치우라고 하지도 않고 얌전하게 있길래 좋아하는구나 싶었지"
퀼은 밝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갔다.
"선물은 생각도 못 했는데... 고마워 로켓, 잘 가지고 다닐게. 정말로! 그리고 내 선물은 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버리지는 말아줘"
알겠지? 라고 덧붙이며 흐흐 웃어 보인 퀼이 손에 있던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핕 내가 이걸 어떻게 버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로켓은 목도리에 코를 묻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말을 듣고 환하게 웃는 퀼을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준 선물과 함께 미리 맞이하는 둘만의 특별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있었다.
w. 아초_@achoo_co
후기
안녕하세요 :)
우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긴 글을 써보는 건 저도 처음이었는데 역시 쓰고 보니 글쓰기란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모쪼록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ㅠㅠ
무엇보다 합작을 열어주신 호사님께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덕분에 풍족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ㅠㅠ)
앗 그리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온 뒤 퀼이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로켓이 준 인형 키링이, 로켓의 침대 한구석에는 퀼의 목도리가 자리를 차지했다는 내용까지 넣고 싶었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그만... 이렇게라도 덧붙입니다 ㅎㅎ 그럼 이만 모두 따뜻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