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로스트 산타클로스
페이스오웬
페이스에겐 크리스마스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촉박했냐 묻는다면 긴 말 필요 없이 현재 그의 옷차림만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옷자락에 잭슨 폴록 작품처럼 튀어있는 핏자국은 아무리 잘 쳐주더라도 전체이용가는 아니었으니까. 겉옷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페이스는 축축하게 젖어 든 내의를 느끼며 차라리 핏자국 튄 겉옷을 벗어 내릴까 깊이 고민했다. 붉게 젖은 안의 옷을 산타 코스프레라고 한다면 대충 웃어넘길 수 있지 않을까. 몽롱한 정신에 택도 없는 생각을 하던 페이스가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후각이 이상할 정도로 예민한 그 애를 그렇게 허튼 수로 속여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집중하느라 잠깐 걸음을 비틀거리니 등에 짊어진 짐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페이스는 생각보다 더 앞선 손을 뻗어 눈밭에 나뒹구는 그것을 주웠다. 핏기가 가셔 창백한 손에 들어온 건 공룡모형이었다. 지긋지긋한 푸른색 비늘, 벨로시랩터.
피규어를 스티로폼 부시 듯 구겨버리려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킨 페이스가 무거운 발걸음을 직직 앞으로 끌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로 향하는 발걸음도 이 정도로 무거울 것 같진 않을 듯 했다. 끼릭끼릭 질리도록 듣던 랩터 울음소리가 이명처럼 고막 안을 후비고 찌르는 것에 페이스가 온 몸을 떨었다. 사람을 아끼는 일조차 힘겹게 배운 사람이 미물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아무리 연인의 소유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페이스는 자기 속내를 감쪽같이 숨기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본인의 좁디좁은 바운더리를 평생 들키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오웬 그레디만 아니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머독이 보기 드물게 제정신 같은 눈빛으로 페이스를 붙잡는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입에선 호치키스로 대충 박아 이어 붙인 뱃가죽을 제대로 꿰매고 가라는 말이 나올 터였다. 뻔했다. 뻔해서 지겨웠다. 뻔한 말이라면 이미 한 사람에게 평생 들을 치를 다 몰아서 들었던 터였다. 더 이상은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페이스는 못 들은 척 귀를 닫고 빠트린 짐이 없는지 꼼꼼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군 시절 총기 검수도 이 정도로 열심히 하진 않은 것 같은데. 버블건, 변신로봇, 마법봉, 인형 등 쏟아지는 굿즈들에 이슬라 누블라 로고가 깔끔하게 박혀 있었다. 선물이라기엔 하나 특별할 것 없이 질리도록 봐왔을 물건들일 테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곤죽이 된 인생 빨간 줄 하나 더 그인다고 큰 상관은 없었으므로 미친 척 강도질도 고려해 봤으나 크리스마스 이브날 백화점은 메뚜기 떼라도 다녀간 듯 텅텅 비어있을 것이 자명했다. 무엇이든 해결해 준다는 그 A팀이라도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누군가의 산타를 대변하는 게 이렇게 난이도 높은 임무였나. 팔자에도 없는 산타 노릇이 버거웠다. 원래 이 계획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예수 생일이 끝나기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하기엔 늦은 생각이긴 했지만 페이스는 기억을 해야만 했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른 할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좀 더 맛이 달고 따뜻한.
원래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하려 했더라······.
아, 생각난다. 생각만으로 비식비식 웃음이 나 페이스는 실실거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흩날리는 웃음소리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코피는 신경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올해 크리스마스, 페이스는 분명 파티를 하려 했다.
*
"파티??"
빙글 돌아간 눈을 반짝 빛내는 머독의 얼굴을 비에이가 꾹꾹 밀어낸다. 머독의 들뜬 목소리를 빼고는 대답조차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머독을 제외한 모든 인원의 반응이 석연치 않은 건 다소 예상 밖이었다. 한니발 만큼은 대강 장단을 맞춰줄 줄 알았는데. 페이스가 입술을 비죽이는 걸 보며 비에이가 고개를 젓는다. 이 자식이 연애사업 시작하고 징그럽게 투정만 늘었어.
"대위가 정말로 좋아하겠어 Kid."
한니발은 보기 드물게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다. 페이스의 멱살을 잡아 끌더니 뒷목을 주무르며 하는 말은 더 낮게 흘러나왔다. 네 사적인 사랑놀음에 팀을 끼워 넣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래봤자 방 안에 인원들은 다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였다. 구석에서 작전 서류를 들추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언짢게 구겨진다.
"다 들려요 한니발···."
아, 거기까지 들릴 줄은 몰랐군.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한니발이 페이스의 뒤통수를 톡 치며 떨어진다. 오웬이 한숨을 쉬며 책상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서류 더미를 정리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이팀을 이슬라 누블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어. 너무 늦은 후회를 되새김질하는 오웬이 피곤한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그런 오웬의 얼굴을 본 페이스의 눈썹이 팔자로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와 징그러워!! 머독이 즐겁게 외친다. 비에이는 흉하고 역한 연기라며 조잘거림을 장전한 머독의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가는 한니발을 후다닥 따라 나갔다. 남의 사랑놀음에 샌드위치 되기 싫은 건 비에이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 해요 중위.“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데?"
억울한 목소리에 덕지덕지 묻은 투덜거림이 짙었다. 제가 아는 어떤 10살보다도 철없어 보이는 모습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참 글자를 들여다보던 눈이 쨍한 파란색과 마주하니 견딜 수 없이 시려옴에 눈물 한줄기가 찔끔 나온다. 오웬은 애써 따갑게 내려앉는 시선을 무시하며 눈가를 옷소매로 꾹꾹 눌렀다.
"어차피, 그날은 선약이 있어서······.“
"선약?"
예의 없이 단번에 말 허리를 잘라 오는 말의 기세가 과하게 날카로웠다. 페이스가 순식간에 다른 사람처럼 태도를 변화시키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목소리에 찔리기라도 한 듯 움찔거리는 몸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시간 그 주제넘은 분노를 가만 받아들이던 오웬이 운을 뗀다. 이제 이 정도로는 황당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떼쟁이 30대 말고, 산타가 필요한 진짜 꼬맹이랑, 트리도 만들고, 캐롤도 부르고, 선물도 주고, 즐겁게 파티도 하고."
황당하지 않다고 해서 짜증이 안 난 것도 아니기에 오웬은 일부로 페이스의 흉내를 내봤다. 페이스야말로 오웬이 태어나 본 인간 중 가장 얄미운 사람이었으니. 오웬은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말끝마다 악센트를 넣어 약속의 내용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똑같이 유치해지니 복수한 것 같은 기분도 아니고 오히려 바보가 된 것 같군. 머쓱해진 오웬이 감았던 눈을 슬쩍 뜨니, 앞에서 팔짱을 낀 페이스의 표정이, 불퉁하게 구겨지거나 어이없는 표정일 거라 예상했던 그의 얼굴이······.
"귀엽게 굴긴···."
"네??“
"좋아, 자기 집 꼬맹이랑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다 이 말이지.“
"엄밀히 따지면 셋이죠. 클레어도 오니.“
"뭐??"
시끄러워요 중위. 결국 둘 중 먼저 인상을 찌푸리는 쪽은 오웬이다. 머리를 헤집으며 이상한 소리를 내던 페이스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폭탄 발언을 던진다. 나도 갈래!!! 아니, 갈 거야. 이건 통보야. 지금껏 페이스와 지내오면서 그의 막무가내엔 단단하게 단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건만. 페이스는 어떻게든 오웬의 두통을 이끌어내는 인간이었다. 그 대책 없는 공수표가, 짜증나는 빈말치레가, 알맹이 없는 선언이, 지키지 못할 약속이
오웬은 머리가 아플 만큼 가슴이 저려서······.
"당신 어차피 약속 지키지도 않을 것 아닙니까."
어지간히 짜증이 돋았는지 딱딱한 군인 말투가 쏟아진다. 페이스는 뜨끔 저려오는 속을 티 나지 않게 다스려야 했다. 그는 오웬이 약속에 관하여 유독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첫 만남을 기념하는 날 페이스는 그답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오웬은 답지 않게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는 랩터들의 후각에 좋지 않다며 사절하던 퍼퓸까지 뿌렸었다. 안 그래도 희미하던 향이 영영 옅어질 때마다 오웬은 손목에 향을 묻혔다. 레스토랑 마감 시간까지 몇 시간을 앉아 그 짓을 반복했을 오웬을 생각해 보면 그 아무리 금치산자인 페이스라도 양심이 아리긴 했다.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오웬의 생일과 페이스의 생일, 그 이외에 사소하게 지나갔던 모든 약속들이,
"난 이제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대하게 만들지 마세요."
진심으로 피곤 하단 듯 눈가가 거뭇해진 오웬이 자리를 정리하곤 회의실을 나가려는 걸 페이스가 단단하게 붙잡는다. 손길이 어찌나 억셌던지 오웬은 순간 본인의 손목이 수갑에 걸린 건지 착각을 할 뻔한 정도였다. 옴짝달싹 못 하게 메인 살점 안의 뼈마디까지 아팠다. 어디서 힘자랑이야. 지키지 못 할 약속을 던지는 것 다음으로 오웬이 질색하는 페이스의 못된 버릇은 힘으로 저를 제압하려 드는 습관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에 망정이지. 다른 말로는 지금 페이스의 상태가 평정이 흐트러져 있다는 증거였다.
"지킬게."
약속, 지킨다고. 오웬이 페이스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반응이 없는 오웬이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힘주어 말을 반복하기까지 했다. 오웬은 팔을 들어 스치듯 페이스의 팔목을 어루만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현직 특수부대원의 신경에도 포착되지 못할 만큼 아주 순간이었다.
"애초에··· 어딜 오려는 겁니까? 설마 지금 유치하게 10살짜리나 클레어를 질투하는 건 아니겠죠."
농담을 쥐어짜니 그나마 분위기가 풀어진다. 오웬은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억지로 들뜨게 만들었다. 어디서 봤는데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잡는답시고 진지한 말을 퍼부으면 꼭 끝은 새드엔딩이더라. 에이팀과 연결되어 있는 마지막 임무가 바로 나흘 뒤였다.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두 명이 그토록 노래를 부르던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뒤였고. 괜한 부정을 타고 싶진 않았다. 선물을 빠트리면 문밖에 세워둘 줄 알아요. 뒤에 이어질 문장은 너무 간지러워 소름이 끼쳐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것이었으니 오웬은 말을 아꼈다. 당신 존재 자체가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텐데, 알몸으로 참석한다 해도 당신의 파티 입장이 제한 될 일은 없을 걸요. 물론 세 명분 정도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기야 하겠지만···.
*
유서랍시고 받은 종이를 수령하고서 페이스는 네 번째로 창문을 깨부쉈다. 크리스마스 하루 전.
*
작전 중 문득 한 명이 산다면 당신이 나을 거 같다는 중얼거림은 오웬의 고질적인 말버릇이자 페이스가 질색하는 헛소리 중 하나였다. 당신에겐 팀이 있고, 내게는 주변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이치라는 건조한 말투. 그 섬에서 메이지를 구해낸 후에는 그나마 빈도가 줄은 말이었는데. 페이스는 오웬의 이 말이 진지하진 않더라도 분명한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의 막바지로 다다른 임무에 블루를 케이지 안에 넣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만 남아있는데 저런 불길한 말을 할 건 뭐란 말인가. 그동안의 복수라도 하는 건가 싶어 심술 난 마음에 페이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대응하리라 단단히 마음을 굳혔지만 그 뒤에 나온다는 소리가 영 가관이었다.
"애를 다루는 건 당신이 나보단 나을 것 같거든···."
페이스가 온 얼굴로 질색을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난 도마뱀 아가씨를 수양딸로 들일 계획이 없거든. 페이스는 툴툴거리면서도 짐승의 기척을 느끼는 데 곤두선 신경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오웬이 있다고 해도 블루는 몇 초 만에 장정 몇을 찢어 죽일 수 있는 병기였다. 오웬은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쪽은 기대도 하지 않았단다. 페이스가 복잡한 기분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 나쁘구만···. 블루는 클레어한테 맡겼다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크리스마스를 잘 챙길 준비가 되어있느냐 이겁니다. 페이스가 들릴 듯 말듯 한숨을 쉬며 총구를 내려놓았다. 페이스는 오랜만에 일하는 중 긴장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또 그에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이상하도록 살이 연한 심장에 긁은 자국을 내는 건 사양이었다. 죽는 게 네 소원이야?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말투였다.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당장에 손에 들고 있는 총으로 가장 아프지 않을 부위를 관통시켜 줄 거라고 생각될 만큼 다정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번엔 오웬이 할 말을 잃을 차례였다. 두 사람 사이 정적이 제법 짙었다.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는데···."
지겹도록 오래오래, 지랄 같은 온난화에 빙하가 다 녹아도 우리만 노아의 방주 타고 살아남고, 지진으로 온 땅이 뭉개져도 우리만 구름 위에 살고, 공룡이 이 땅덩어리 다 집어삼켜도 우리만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오두막에 들어가서 살고, 너무 지겨워서 죽어버리고 싶어도 네 얼굴만 보면 다시 살맛 나서 또 수년을 부대끼며 살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난.“
"우리가 될 수 있어요?"
저희 두 사람이, 우리가 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뼈아픈 질문이었다.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덜컹인 페이스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던 오웬의 얼굴을 바라본다. 단호한 듯 맹하고 단단한 듯 연약한 그의 얼굴을 보면 사방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표정 숨기는 법도 잘 모르는 주제에 자꾸만 더 깊은 속마음을 뜯어보고 싶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항상 약속을 어겼던 건가. 그 초록빛 섬에 정착하고 싶어질까 봐, 내가 감히 그런 걸 꿈꾸게 될 것 같아서.
평생 네 기대에 부흥하는 짓만 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응.“
"그럴게."
오웬의 내장 깊은 곳이 자르르 진동했다. 희열이기도 하고 울분이기도 하며 행복, 같기도 한 무언가가 펄떡펄떡 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오웬은 이 순간에도 페이스를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 가슴팍을 활짝 찢었다. 갈비뼈를 꺾은 것은 물론이다.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성가신 폐를 치워냈다. 그곳엔 기어이 심장이 있었다. 누군가의 지독한 회피가 힘껏 난도질 했던 심장. 오웬은 쓰게 웃었다. 당신 덕분에 이 살점 다시 으스러진다 해도, 그 상처조차 기껍게 껴안고 싶은 나는.
"그래요. 안 죽을게요."
"당신이랑 같이 살게요."
분명 오웬은 그렇게 말했었다.
*
근데 내가 네 죽음을 믿을 리가 없잖아.
내가 그딴 소릴 믿을 리가 없잖아 제발 생각 좀 하고 아가리를 열어 아직도 나를 몰라?? 씨발 증거도 없이 그딴 말만 읊을 거면 여기 왜 왔는데 한니발 이거 놔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씨발 좀 놓으라고!!
장정 몇이 달라붙어 페이스를 온몸으로 뜯어말렸다. 길들여지지 않은 들짐승에 목줄을 거는 듯한 모양새였다. 제대로 처치하지 못한 복부의 상처가 터진다. 순식간에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피 냄새에 더욱 흥분하는 금수처럼 페이스가 비명같이 그르릉 목 안쪽을 울렸다. 흐려지는 벽안에 들어오는 1인실의 디지털 달력, 점멸하는 붉은 획들, 눈앞에 성큼 다가온 크리스마스 디데이, 아, 그놈의 빌어먹을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그에게 약속을 어기는 사람으로 남기 싫었다. 거짓말쟁이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
변명의 여지 없이 형편없는 낯빛이다. 얄밉도록 깐깐했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수척하게 그늘져 있었다. 페이스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안 돼 보인다고 느끼다 곧 생각을 관뒀다. 지금 제가 누군가의 얼굴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클레어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페이스,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에 본인이 놀란 클레어가 입을 틀어 막는다. 걸음마다 흥건하게 젖은 발자국을 보니 표정이 더욱 절정으로 일그러진다. 오웬의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참담한 표정이었다. 제발 병원에 가라는 손길을 뿌리치고 대충 피를 닦은 뒤 옷만 후다닥 갈아입었다. 더 이상 미적거리면 크리스마스가 끝나버릴 판국이었다. 탁자에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메이지에게 페이스가 기계적으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늦어서 미안해. 지금의 페이스가 낼 수 있는 가장 밝은 목소리였다. 과장된 몸짓으로 보따리가 잘 보이도록 꾸러미를 어깨에 크게 둘러 얹었다. 평소라면 무게조차 느끼지 못했을 짐꾸러미가 천근만근 같았다. 록우드의 저택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가씨의 성에 차는 선물이어야 할 텐데. 입으로 울컥울컥 넘어오는 역한 맛을 삼키며 페이스가 쾌활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한 해 동안 착하게 지내 온 아이에게 도착한 선물을 확인해 볼 사람??
"오웬은요?"
분명 같이 온다고 했었는데, 얼굴이 어두웠던 아이의 얼굴이 무언가를 직감한 듯 새카맣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이건 안 될 일이었다. 에이팀의 페이스는 원체 위장과 잠입이 주특기였다. 어린 아이 하나 속여 넘기지 못한다면 그 이름값을 반납해야지 마땅할 터였다. 페이스는 내장을 두드리는 압박이 치미는 복부를 무시하고 메이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춰지지 않는 절망의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제법 연로 왕자 같은 모습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웬은 합류가 늦어져서, 안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꼭 함께 보낸다고 약속했었거든, 눈이 너무 쌓여서 진입이 어렵나 봐,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올 테니까. 도착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얼굴만 보고도 거짓말을 판가름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선 안 됐는데.
*
클레어는 눈가를 가렸다가 메이지를 감싸 안으며 무너졌다. 거짓말. 울먹이며 속삭이던 메이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거짓말쟁이. 페이스에게 하는 일갈인지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오겠다던 오웬을 향한 원망인지 페이스는 구별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페이스는 저 섧은 격노가 제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네가 원망받지 않길 원했다. 어느새 웃는 얼굴도 지친 페이스가 메이지의 맞은편 의자에 무너져 내린다. 넌 항상 내 속임수를 매도하고 거짓말을 비난했지. 하지만 네가 이 꼴을 보고 있었더라도 그렇게 말했을까. 넌 정말로 내가 꼬맹이에게 오웬은 블루를 사격하던 실탄 앞을 막아섰고, 난 너를 저격한 인간들을 쐈고, 누구 것인지 모를 피웅덩이가 몇 인분씩 재난처럼 쏟아졌고, 터지는 화산과 폭발 속에서 기절해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잠깐 정신병자처럼 소리 한 번 질러주고, 병실을 꾸역꾸역 탈출해서, 선물을 짊어지고 급하게 오느라. 그래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온갖 진실을 털어 놓아야지 잘했다는 칭찬을 해줬을까. 감당할 수 없는 실혈과 절망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메이지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뒤로 한 페이스가 비틀비틀 대문을 나섰다. 핏기가 바짝 가신 손이 뜨겁게 달궈진 총신을 붙잡는 듯 나무 손잡이를 간절하게 움켜쥔다. 거기 기대지 못했더라면 거목이 넘어가듯 바닥으로 쓰러졌을 모양새였다. 잠시 걸음을 멈춘 페이스가 굳은살 박힌 손으로 나뭇결을 따라 지문을 문대어본다. 오웬이 손수 지은 오두막이니 이곳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너와 손을 잡는다는 착각이 든다. 겨울 날씨에 나무토막이 얼음장같이 차가워도 큰 상관은 없었다. 네 손 역시 자주 차가웠으므로. 그 시린 온도가 내겐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으므로 이 한기에 크게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래, 비통할 것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페이스가 천천히 손을 놓는다. 그게 꼭 누군가를 향한 작별 인사라도 되는 것처럼. 진득하니 미련을 담아서······.
정성들여 기름칠을 해두었던 건지 등 뒤로 닫히는 나무 대문엔 끼익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밖엔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다운 사방이었다. 무언가 눈 속에 파묻는 것처럼 만개하는 함박눈에 오두막 안 서러운 울음소리가 먹먹하게 흐려져 간다. 어린아이 울음이라는 게 듣기만 해도 가슴이 어릿해지는 종류의 것이라 페이스에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지금은 도저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직 크리스마스는 끝나지 않았는걸. 받을 선물의 몫이 남아 있는걸.
크리스마스 당일에 울음을 참지 못한 아이에 주인을 잃어버린 선물들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페이스는 아주 많이 지친 사람의 몸짓이 그러하듯 아주 천천히, 보따리를 눈밭에 내려둔다. 더는 몸을 지탱할 힘도 없었기에 페이스는 스르륵 내려가는 무게를 따라 그 옆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벽에 몸을 기대니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던 압박감이 조금은 가시는 듯 했다. 페이스는 울컥이는 속을 다스리다가 제 꼴을 내려다봤다. 짙은 색으로 물들은 복부에 하얗게 질린 손끝. 빨간 유니폼에 선물 꾸러미라. 하얀 수염까지는 마련하지 못했지만 산타라고 불리기엔 참으로 시의적절한 착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물을 받는 꼬맹이가 애 답지 않게 어른스럽지만 않았다면, 산타 안에 든 알맹이가 녹안이었다면 어찌어찌 속여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페이스가 하고 싶은 말은 항변이며 변명이었다. 들어줄 이도 없는 핑곗거리가 시급했다. 그런 자기변호라도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가미 잘린 물고기처럼 페이스는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나의 어설픔이 결국 너의 마지막 부탁까지 배반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 곳 잃은 선물 더미를 멍하니 바라보던 페이스가 떨리는 손으로 내용물을 뒤지기 시작한다. 시린 손을 인형에 넣어 녹였다가, 트리를 세우기도 하고, 로봇을 한 손으로 튕기다가, 온갖 미친 척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다가,
페이스는 다음으로 손에 잡힌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못 본 척 할 수도 없이 손아귀에 한가득 들어온 존재감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손이 너무 떨려 몇 번이나 눈밭에 떨군 탓에 종이 곳곳이 젖은 문양으로 물들어 있었다. 임무에 들어가기 전 쓰여진 것인지 글씨는 정갈하고 차분했다. 아주 만약에. 제가 임무에서 낙오된다면. 메이지의 크리스마스는 꼭. 이 난데없는 부탁은. 미안하지만. 이렇게 목전에 핵심을 박아두지 않으면. 당신이 편지를 이어 읽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황당한 부탁이라. 투정 부려서. 내가 당신을.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 어쩌면 나는. 중위를. 힘들게. 미안. 항상. 고마워요. 이기적이지만. 사랑하는. 중위. 사랑. 템플턴. 사랑.
뒤로 갈수록 편지의 문장이 엉망진창으로 끊긴다. 어떠한 문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점 흐려지는 줄글에 살아남은 한 단어. 시린 눈동자를 투과해 뇌에 박히는 단어는 오직 사랑뿐이다.
눈에 보이는 사랑이라···.
작게 웃은 페이스가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여느 소설 속 묘사처럼 속이 따뜻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쏟아지는 눈발과 과다한 출혈로 이가 떨릴 만큼 더럽게도 추웠다. 하지만 이마저도 상관없다. 온기보다 더 중요한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페이스는 태생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인간이었다. 형체가 잡히지 않는다고 저를 키워준 성당을 수호하던 신마저 무시했던 게 템플턴 펙이었다.
근데 내가 네 죽음을 믿을 리가 없지!
나보고 시체도 없는 죽음을 믿으라고. 페이스는 웃었다. 비눗방울이 퐁퐁 튀어 오르는 공룡 모양 버블건에서 티라노의 포효소리가 웃음소리에 음산하게 섞이는 것이 B급 시트콤 같기도 했고 유행 지난 호러 작품의 공포 분위기 조성 같기도 했으며 구닥다리 독립영화의 절정 장면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페이스는 제 장르가 로맨스임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페이스는 무지갯빛으로 동그랗게 부푸는 방울들이 눈송이에 부딪혀 깨지는 순간들을 황홀하게 관음하다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바로 작업에 착수할 예정이었으니 지금은 잠깐 쉬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해결해 준다는 에이팀 소속 템플턴 중위의 다음 임무는 정해져 있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더티 블론드에 숲을 깨끗이 반사하던 녹안의 초록빛, 전직 네이비씰 대위에 지금은 사육사로 일을 하던, 별것 아닌 것들에도 쓸데없이 정을 퍼주곤 했던, 두툼한 몸집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낮은 밀도를 가졌던, 그래서 나를 항상 불안하게 만들었던 사람. 일 년에 단 한 번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날 혼자 두고 간 사람.
페이스는 이 놀이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숨바꼭질 따위 코흘리개 메이지를 놀아주던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거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면 견딜만 해졌다. 내가 했던 짓거리의 복수라 해도 참을 수 있었다. 너무 길어진다면야 조금은 곤란하겠지만. 페이스는 이래 봬도 인내심이 깊은 특수부대원이었다. 그 정도 기다리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페이스는 장난스레 송곳니를 드러내며 눈송이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네가 숨는 것에 어설픈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재회가 그리 멀지 않도록. 넌 속마음을 숨기는 것조차 엉성한 사람이었으니. 붉은 물로 축축한 바닥에 눈송이가 닿자마자 녹아내린다. 눈꽃 결정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페이스는 점점 기력이 빠지는 몸에 편안히 힘을 풀었다. 문득 고통같이 밀려오는 피로함이 눈꺼풀을 내리누른다. 몽롱한 정신에 페이스의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인다. 오웬. 그 이름 하나를 부르는데도 가슴에 칼날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페이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웬이 끔찍이도 좋아하던 낮은 목소리였다.
내가 널 찾고 나면,
우리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 다음엔 복잡하게 이런저런 숨바꼭질은 그만둬 버릴까?
어차피 우리 두 사람 다 하고 싶은 건 하나였잖아.
술래든 도망꾼이든 다 관둬버리고 그냥 하나만,
그저 사랑만······.
W. 상사_@sangass